과천(2004-10-04 09:41:13, Hit : 4433, Vote : 861
 숙제


[ 3.2 변화를 통해 변화 없음을 발견한다 ]



탄트라는 사랑의 방편이다.
그리고 탄트라에서 말하는 노력은
존재계와 그대가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66]
동일하지도 않은 동일함이 되라.
친구에게도, 낯선 사람에게도,
명예와 불명예 속에서도 그렇게 되라.

[67]
여기에 변화의 구(球)가 있어 변화하고 변화한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질문]
"변화를 통해 변화를 해결하고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해결한다는 등등의 것은 인간 그 자체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집착이나 고뇌와 낙심이라는 결과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미국의 화학자 나쓰로프(John Howard Northrop)는 서양의 마음은 존재에 대한 이론적인 요소들을 계속 찾아왔다고 어디에선가 말했다. 그것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인과적인 연관성을 찾는 것이었다. 즉 무엇이 원인이고 어떻게 그 결과가 조절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반해 동양의 마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모색해 왔다고 그는 덧붙였다. 동양은 실체에 대한 심미적인 요소를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논리적이기보다는 미학적인 접근이었다.

동양의 마음은 자연을 다스리는 방식을 아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법에 흥미를 느껴 왔다. 정복하기보다는 자연과의 깊은 교제를 원했고, 자연 속에 깊숙이 동참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서양의 마음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이상 그것과 갈등하며 투쟁 속에 있어 왔다. 한편 동양의 마음은 신비 속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어 왔다. 나는 나쓰로프가 내 말에 찬성할지 안할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느낌은 서양의 과학이 자연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투쟁, 정복, 승리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종교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거기엔 갈등도 없고 투쟁도 없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과학이 남성적인 태도라면 종교는 여성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공격적이고 종교는 수용적이다. 동양의 마음은 종교적이다.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준다면 나는 동양의 마음이야말로 종교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과학적인 마음은 바로 서양의 마음이다. 인간이 동양에서 태어나건 서양에서 태어나건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내가 동양 혹은 서양이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두 가지 접근 방식을 대표하는 말일 뿐 어떤 지리적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도 서양에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거기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그대는 철저하게 동양적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대는 단지 태어나기만 동양에서 났을 뿐 과학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 접근은 수학적이고 지적일 수 있다.

한편 탄트라는 절대적으로 동양적이다. 그것은 실체에 같이 동참하는 길이다. 실체와 하나가 되는 길이다. 경계선을 지원 버리고, 분별화되지 않은 영역으로 뛰어드는 길이다. 마음은 분별을 일으키고 경계선을 그으며 정의를 내린다. 마음은 경계선 없이, 정의를 내리지 않고 그 기능을 작동할 수가 없다. 경계선이 더욱 선명하게 그어질수록 마음은 더 활발하게 기능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모든 것을 자르고 나누어 베어 버린다.

종교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미분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경계선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미분화의 영역이란 어떤 것도 그 한계가 없고,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 속으로 녹아드는, 즉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으로 변해 버리는 영역이다. 거기서 그대는 더 이상 자를 수 없다. 존재계를 분별심의 칼로 난도질할 수 없다. 그리고 두 가지 접근 방식에 있어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접근에 의해서, 다시 말해 자르고 나누고 베어 버리는 일을 통해서 그대는 죽은 입자, 죽은 원자들만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잘려 들어가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르는 순간 생명은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음표 하나하나를 읽음으로써 교향악 전체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각각의 음표는 교향악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교향악 자체는 아니다. 교향악은 아주 많은 음표들이 어우러져 각자 속으로 녹아들 때 비로소 그 실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대는 음표 하나하나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교향악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대의 부분을 연구해서 그대를 알 수는 없다. 그대는 단순한 부분의 통합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 이상이다. 그대는 나누어지고 분석되어 정리되었다. 생명은 사라진다. 거기에 오직 죽은 부분들만 남아 있다. 과학자가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미 물체가 되어 버린 것 말이다. 과학은 결코 생명을 지켜볼 수 없다. 과학은 생명을 다스릴 수 없다. 부분들만 알 수 있다. 죽은 부분들만 말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생명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명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미지의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그 방법론 때문에, 그 접근 방식 때문에 생명은 과학을 통해서 알려질 수 없다.

과학이 물질만을 주장하고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과 어떤 접촉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된다. 만약 그대가 종교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물질을 부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샹카라는 물질이란 환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단지 나타나 보일 뿐이다. 동양적 접근 방식의 전체적인 입장은 이 세상을, 물질을, 물질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왜인가? 과학은 생명을, 신성을, 의식을 부정한다. 만약 그대가 분별화시키지 않는 생명을 본다면 물질은 사라진다. 물질이란 생명이 분리된 것이며 분화된 것이다. 물질이란 정의되고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분석된 생명을 뜻한다.

그래서 물론 그대가 생명을 분화시키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과 하나될 수 있다면, 그 속에 깊이 동참할 수 있다면, 두 연인이 하나가 되듯이 존재계와 하나될 수 있다면 물질은 사라진다. 그래서 상카라는 물질이 환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가 만약 존재계에 깊이 동참한다면 그대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의식은 단지 부산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고 단지 물질의 한 기능일 뿐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대가 생명을 갈가리 분리한다면 그때 의식은 사라진다. 그래서 의식은 환상처럼 보인다. 그때는 오직 물질만이 남는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존재계는 하나다. 만약 그대가 분석을 통해서 존재계에 다가간다면 그것은 물질로서, 죽은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동참을 통해 그것에 다가간다면 그것은 생명으로서, 신성으로서, 의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과학을 통해 그것에 접근한다면 거기에는 그대에게 깊은 축복을 가져다 줄 어떤 가능성도 없다. 죽은 물질이 축복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환영처럼 나타날 뿐이다. 오직 깊은 동참만이 축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탄트라는 사랑의 방편이다. 그리고 탄트라에서 말하는 노력은 그대가 존재계와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그 속으로 들어가려면 그 전에 많은 것들이 그대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대는 사물을 분석하는 습관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리고 뭐든지 싸우고 보자는 태도나 정복이란 단어를 생각하는 것도 없어져야 한다.

힐라리가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에 이르렀을 때 서구 세계는' 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 사건을 보도했다. 오직 일본의 선원에서만 벽보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에베레스트는 인간을 그의 친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정복된 것이 아니다. 에베레스트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제 인류는 그것과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정복과 다르다. 에베레스트는 힐라리가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정복이 아니다. 정복이란 단어는 폭력적이며 무뢰한의 말이다. 정복이란 단어는 공격성을 나타낸다. 에베레스트는 힐라리를 받아들였다. 그를 환영했다. 이제 인류는 그것과 친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괴리의 틈에 다리가 이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출입을 거부당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 중의 하나가 에베레스트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인간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하나의 가교가 건립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대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 방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하라. 탄트라는 존재계를 향한 사랑의 노력이다. 탄트라에서 섹스가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존재계가 한 여성을 통해서 그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만약 그대가 여자라면 존재계는 남자를 통해 다가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탄트라에서는 섹스가 그토록 많이 논의되고 사용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절대적인 무성(無性)의 존재로 생각하라. 마치 모든 섹스가 그대에게서 제거된 것처럼, 막 태어나서 섹스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사랑을 나눌 능력이 없어질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연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대 자신을 벗어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그대는 문을 굳게 닫힌 채로 남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다른 누구에게도 접근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다. 존재계 바로 그 속에서 그대는 죽은 것이 될 것이며 도든 곳으로부터 창문이 닫힌 상태가 될 것이다.

그때 섹스는 그 상황을 빠져 나가려는 그대의 노력이 된다. 그때 그대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다른 사람이 그대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그대는 자신의 에고를 뒤에 남겨 놓은 채 앞으로 나간다. 다른 존재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그대가 그 만남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대는 굴복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만나기 원한다면 그때도 그는 자신을 빠져 나와야 한다.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이 기적을 보라.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그대는 상대방에게로 들어가고 상대방은 그대에게로 들어간다. 그 또는 그녀는 그대 속으로 들어가고 그대는 그 또는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자리를 바꾼다. 이제 그는 그대의 영혼이 되며 그대 역시 그 또는 그녀의 영혼이 된다. 이것이 바로 동참이다. 이제 그대는 만나고 있다. 이제 그대는 하나의 원이 되었다. 이것이 그대가 에고에서 벗어난 첫 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은 더 큰 만남인 우주와의, 존재계와의, 실체와의 만남을 향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탄트라는 지적인 능력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탄트라는 지적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의 노력이다. 이를 기억하라.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방편을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자, 이제 첫 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66]

동일하지도 않은 동일함이 되라.
친구에게도, 낯선 사람에게도,
명예와 불명예 속에서도 그렇게 되라.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이 되라.’ 이것은 그대의 기본이다. 그대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두 가지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 속에 남아 있는 어떤 것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보지 못할 수도 있고, 아직 그것과 대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동일함 때문에 그대는 자기 동일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일함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중심으로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혼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보통 그대는 '나의 어린 시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나의 어린 시절'이라고 말하는가? 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대의 어린 시절에서 그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그대에게 처음으로 보여준다면 그대는 그 사진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 그대의 육체는 더 이상 이전의 그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세포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생리학자들은 몸이 하나의 흐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강처럼 매순간 흐른다. 매순간 많은 세포들이 죽어 가고 있고 다시 태어난다. 10년 동안에 그대의 육체는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70년을 산다면 그대의 몸은 적어도 일곱 번은 완전히 새롭게 바뀔 것이다.

매순간 그대의 몸은 변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도 변한다. 그전에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본 적이 없다면 그대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알 수 없다. 만약 어린 시절에 찍었던 마음의 청사진이 있다면 그것을 알아보기란 불가능하다. 그대의 마음은 육체보다 더 빠른 흐름이다. 매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단 한순간이라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달라진 그대는 저녁에 또다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붓다를 만나러 왔다. 그가 떠날 때쯤 붓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은 이제 나를 만나고 돌아가는 사람과 다르다. 그대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그대의 마음은 변했다."
물론 붓다와의 만남은 그대의 마음이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지게 했을 것이다. 만나기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그대는 처음 여기에 올 때 다른 마음을 갖고 왔다. 그리고 돌아갈 때 또 다른 마음을 갖고 갈 것이다. 어떤 것이 변했다. 어떤 새로운 것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어떤 것이 지워졌다. 그대가 다른 누구도 만나지 않고 그대 자신만을 대면했더라도 그때 역시 그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매순간 강물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헤라클리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이것은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같은 사람을 두 번 만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실 때문에,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삶이 그토록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계속 같은 사람, 변함없는 사람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대는 한 여자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녀가 변함이 없기를 기대한다. 그녀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결혼하고 나면 하기 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연인이 달라진다. 남편이 달라진다. 그대는 남편을 통해서 그대가 만나고 싶었던 이전의 그 멋있는 연인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연인은 연인이고 남편은 남편인 것이다. 사랑하던 남자가 남편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그대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불행을 싹트게 한다. 불필요한 불행을 말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이란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면 그대는 어떤 희생도 없이 많은 불행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변한다는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사랑한다. 그때 그대는 그에게서 사랑을 계속 기대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대를 증오한다. 그러면 그대는 당황하게 된다. 그의 증오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기대 때문이다. 그는 변한다. 그는 살아있다. 따라서 그는 변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대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음 순간 미움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라. 다음 순간이 또 지나면 그는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서두르지 마라. 그저 인내심을 가져라. 만약 그 역시 이 변화의 형식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 그는 변화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자신의 몸을 본다면 그것은 변한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변한다. 결코 동일하게 남을 수 없다.

기억만이 여전히 동일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은 기억으로 충분하다.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잊을 수는 있다. 그대는 자신을 둘러싸고 변화하는 세계에 완전히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그대의 몸과 마음을 함께 말이다. 그대는 중심을 완전히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중심은 변화하는 흐름에 의해 완전히 구름이 덮혀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거기에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변화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므로 언제나 변치 않은 동일한 것은 기억해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어떤 잡음이 그대 주위에서 들린다면 그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하루 종일 탁상시계가 째깍거리면 그대는 그 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이 멈추면 그대는 즉시 알아차린다. 만약 변하지 않는 동일한 것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면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거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야 마음은 그 변화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하나의 틈을 만들어 내고 그 틈은 진동한다. 그대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들어 왔고 그래서 주의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갑자기 멈추면 그대는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의식이 갑자기 하나의 틈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빨이 하나 빠졌을 때 혀가 그 틈새를 계속 훑는 것과 같다. 이빨이 빠지지 않았을 때는 혀가 거기로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 이빨이 없다. 단지 틈새만 있을 뿐이다. 그때 그대가 무엇을 하건 혀는 하루종일 그 틈새를 훑을 것이다. 왜인가? 어떤 것이 빠져 버렸고 그 배경도 변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선 것이다.

어떤 새로운 것이 들어설 때마다 그대는 의식하게 된다. 수많은 이유로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안전도 측정이다. 그것은 그대의 생존에 꼭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어떤 것이 변화할 때 그대는 그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그 변화가 위험 신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닥쳐온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전부터 있어왔던 그대로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대는 자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 속에 이 동일한 요소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태초란 것이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떤 종말이 있다면 그것은 종말까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영원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영원히 동일한 것이 있지만 그대는 그것을 놓치고 있다. 그대가 육체에 대해서는, 마음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들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그대 자신이라고까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단지 그것들을 알 뿐인데도 그대는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몸과 마음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영적 수행은 동일하지 않는 것 속에서 동일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그대의 중심이다. 만약 그대가 그 중심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때 이 방편은 쉬워진다. 혹은 그대가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때 기억해 내는 것은 쉬워진다. 어느 쪽이건 그대는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이 방편은 '친구에게나 낯선 사람에게나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으로 대하라'라고 말한다. 친구에게, 그리고 그대의 원수에게, 혹은 낯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이 되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대가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그대의 친구가 그대를 만나러 온다면 그대는 그를 평소와 다르게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낯선 사람이 그대를 만나러 온다면 그때는 친구를 대하듯이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낯선 사람을 마치 이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대할 수 있는가? 그대는 할 수 없다. 거기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 동일함이 존재한다. 그 마음 자세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동일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모르는 사람을 이미 알던 사람처럼 만날 수 없다. 그대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기껏해야 가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은 아무 효과도 없다. 거기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대는 친구를 만날 때 친구에게 일부러 친구인 척 가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낯선 이에게도 마치 친구인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만약 그에게 친구처럼 대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가장이다. 그대는 동일하게 대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동일하지 않음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에 있어서는 동일할 수 있다. 그대는 낯선 이를 바라보듯이 친구를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마치 친구처럼 대하라' 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이 말 역시 가능하지 않다. 친구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가능할 때 그대는 낯선 사람도 친구처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친구들을 마치 낯선 사람처럼 바라본 적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그때 그대는 전혀 그들을 정확히 바라볼 수 없다. 그대의 아내를 바라보라. 그대는 그녀를 진짜로 아는가? 그대는 20년동안 그녀와 함께 살아왔다.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녀와 더 많이 살수록 그대는 그녀가 본래는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그녀는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대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로 그대가 그녀를 더 많이 사랑한다면 그녀는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많이 사랑할수록 더 깊이 들어가 그녀 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아 있기에 매순간 변화한다. 만약 그대가 깊이 바라보지 않는다면, 단지 그녀가 그대의 아내라는 면에만 집착한다면 그녀는 언제나 같은 이름을 가진 정형된 틀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 그대는 그 틀을 자신의 아내라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변해야 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감추어야 한다. 그녀도 사랑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가장해야 한다. 그대가 아내로부터 사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때 모든 것은 거짓이 된다. 그녀는 변화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때 어떤 것이 강요되고 관계 전체가 죽은 것으로 된다. 따라서 그대가 사랑할수록 그대는 변화의 형태를 더 깊이 절감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매순간 낯선 이가 된다. 그대는 예견할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아내가 내일 아침 어떻게 행동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다. 그것은 그대가 오직 죽은 아내, 죽은 남편을 가졌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예상이란 사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알면 된다. 그는 죽은 것이다. 그의 삶은 단지 거짓일 뿐이다. 그래서 그대는 예상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다. 그는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친구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라. 그도 한 사람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계속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친구를 낯선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면 낯선 사람으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는 더 이상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친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기대나 좌절 없이 말이다. 아무도 그대의 기대를 채워줄 수 없다. 그대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다른 사람이 그대를 만족 시켜 주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그대가 자신을 만족시켜 주리라고 기대한다. 그때 갈등이, 폭력이, 투쟁과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낯선 사람임을 염두해 두라. 그 점을 잊지 마라. 그대의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도 낯선 사람이다. 가능한 한 그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람 말이다. 이런 느낌이, 이런 앎이 그대에게 일어난다면 그대는 낯선 사람을 바라볼 수 있고, 또한 그속에서 친구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친구가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낯선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낯선 사람을 바라보라. 완전히 낯선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대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대와 국적도 다르다.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도 그대와 다르다. 그대가 백인이고 그는 흑인이거나, 그대가 흑인이고 그가 백인일 수도 있다. 그와 언어를 통해서는 의사를 교환할 수 없다. 나라도, 종교도, 인종도, 피부색도, 그 어떤 것도 공통적인 배경이 없다. 그는 전적으로 낯선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눈을 들여다 보라. 거기엔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인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통분모다. 같은 존재계다. 그대가 그것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그대는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침묵으로도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을 그대가 깊이 들여다볼 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들여다보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원수조차 그대를 속일 수 없다. 그대는 그 속에서 친구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그대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아무리 멀더라도 그는 그대에게 가깝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와 같은 존재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와 같은 존재의 대지를 밟고 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나무조차 그대와 상관이 있게 된다. 돌멩이 하나까지도 그대와 멀지 않다. 하나의 돌멩이는 매우 낯설다. 만남을 이룰 공통적인 배경도 없고 어떤 의사전달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같은 존재계가 거기에 있다. 돌도 역시 존재한다. 돌도 역시 존재 속에 동참한다. 그는 거기에 있다. 나는 그것을 '그'라고 부른다. 그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태양은 그에게도 떠오른다. 그대에게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그는 이 땅위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죽는 날이 있듯이 그도 죽는 날이 있다. 그 돌은 사라질 것이다. 존재계 속에서 우리는 만난다. 그 만남이 곧 우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모두 다르지만, 다르게 현현되었지만 본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다.

현현 속에서 우리는 모두 낯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멀다. 그대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고 서로 껴안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가까워질 가능성은 없다. 그대의 인격이 변하는 한 그대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비슷할 수도 없다. 그대는 언제나 낯선 사람이다. 거기에서 그대는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대가 만날 수 있기 전에 이미 그대는 변하기 때문이다. 만남의 가능성이 없다. 육체와 마음에 관한 한 그 어떤 만남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만날 수 있기 전에 이미 그대는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

그대는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것은 매우 깊은 갈구이다. 그대는 그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라진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이제 거기에 없다. 한낱 추억일 뿐이다. 그전에는 거기에는 그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대가 그것에 동의하고 실현시킨 바로 그 사실이 변화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대가 그것을 느낄 때 그것은 본질 속에 깊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시간과 변화의 틀 속에 집어 넣고 있다. 그것은 강물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대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지켜보기란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지켜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그때 그대는 볼 수 있다. 친구 속에 낯선 사람이 있고 낯선 사람 속에 친구가 있다. 그때 그대는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으로 남을 수 있다. 그대는 주변만 변했다. 본질에서는, 중심에서는 동일함이 남아 있다.

명예와 불명예 속에서도 누가 명예스럽고 누가 불명예스러운가? 그대인가? 결코 아니다. 오직 변화하고 있을 뿐이지 그대가 아니다. 누군가 그대를 존경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는 그대의 특정한 모습만을 존경한다. 그는 그대의 변화하는 인격 속에 나오는 한 장면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대는 친절하고 사랑이 넘친다. 그는 그것을 존경한다. 그러나 이 친절과 사랑은 단지 주변적인 것이다. 다음 순간 그대에게는 사랑이 사라진다. 그대에게 증오가 넘친다. 거기에 어떤 꽃도 피지 않는다. 오직 가시들만 돋아 있다. 그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슬프고 침울해져 있다. 혹, 그대는 잔혹해져 있으며 분노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그대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를 멸시할 것이다. 그때 다시 사랑이 나타난다. 타인이 그대를 만날 때 그들은 그대 자신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라는 현상, 그대의 변화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그대를 존경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둘 중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를 알 수 없다. 만약 그대조차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공식만을 갖고 있다. 그들 나름대로의 이론, 잣대, 기준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근석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하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저러하다면 우리는 그를 멸시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들의 시금석과 접촉할 수 없다. 단지 그대의 변화하는 겉모습만 접촉할 뿐이다.

그들은 그대를 하루는 죄인이라고 부르다가 다음날은 또 성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은 오늘 그대를 성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날은 그대에게 반대할 것이다. 돌로 그대를 쳐죽일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들은 그대의 주변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대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들의 이해력 너머에, 이해력 밖에 존재한다. 그들의 비난, 그들의 감사, 그들이 하는 무슨 행동이라도 그대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 속에 나타나는 그대의 겉모습에 관한 것일 뿐이다.

선(禪)의 일화 한 가지를 들려주고 싶다. 한 젊은 수행승이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젊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그를 보고 즐거워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를 존경했고 위대한 성자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루는 모든 것이 거꾸로 뒤바뀌었다. 한 나이 어린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녀는 부모에게 아이 아버지가 그 수행승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마을 전체는 그를 불신하고 반대했다. 깊은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처녀가 아이를 낳자 그들은 그의 암자로 몰려가 그것을 불태워 버렸다. 매우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그들은 아기를 그 승려에게 던졌고, 특히 그 처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애는 당신 자식이다. 그러니 책임을 져라.' 그러자 그 승려는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가? 그때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고 아기를 돌보는 데만 열중했다.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불탄 암자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아기는 배가 고파서 계속 울어댔다. 그 승려는 아기를 안고 시내로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가 그에게 시주를 하겠는가? 단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위대한 성자로 대접받았는데 이제 그는 가장 파렴치한 죄인으로 몰린 것이다. 그는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으나 그들은 차갑게 문을 닫아 버렸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 처녀의 집에 당도했다. 처녀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승려가 문밖에 서서 단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마라. 나는 큰 죄인이다. 그러나 아기는 죄인이 아니다. 그대는 이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다.' 그러자 그 처녀는 아기의 진짜 아버지를 숨간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백했다. 그 승려는 절대적으로 결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 전체는 다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특히 처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아기를 돌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애걸했다. '당신은 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아기가 당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아기는 당신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 '그런가?' 이 아기가 내 자식인가? 라고 말했던 것과 똑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가? 이 아기가 내 자식이 아닌가?'

이것은 이 경전의 방편이 얼마나 삶에 깊이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명예와 불명예 속에서 그대는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내면의 중심은 동일함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주변은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중심은 변화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대는 주변과 중심 그 둘 다이기 때문에 이 방편에 대해 모순적인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방편은 사람과 미움, 가난과 부유, 안락과 불편 등 서로 반대되는 모든 양극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그 상황에서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으로 남는 것이다.

변화란 단지 그대의 주변에서만 일어나고 있음을 알라.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얼마든지 그것과 분리되어 남을 수 있다. 이 분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이 그러함을 알뿐이다. 일부러 한 발 물러나는 것과 같은 노력은 필요 없다. 만약 그대가 일부러 분리되려고 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주변에 서 있게 된다. 그대는 중심을 알지 못한다. 중심은 언제나 주변과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초월적이다. 그것은 항상 저 너머에 있다.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거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을 극단적인 상황에서 시도해 보라. 그대가 동일하다고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모욕할 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그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라. 어떤 것도 보이지 말고,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단지 듣기만 하라. 그는 그대를 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대를 칭찬한다. 단지 들어라. 모욕이나 칭찬이나, 명예나 불명예나 단지 듣기만 하라. 그대의 주변은 반응을 일으키며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것 역시 바라보라. 그 상태를 바꾸지 마라. 그저 바라보라. 그대의 중심에 깊이 들어앉아서 말이다. 그대는 그 어떤 강제력도 기울이지 않은, 그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분리가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한 번 자연스러운 분리의 느낌을 갖게 되면, 그 어떤 것도 그대를 당황시킬 수 없다. 그대는 언제나 고요하게 남는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대는 동요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죽이더라도 단지 몸만 해당될 것이다. 그대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대는 저 너머에 남을 것이다. 이 '저 너머'는 그대를 존재계로 인도할 것이다. 축복과 영원 속으로, 진리 속으로, 죽음이 없는 생명 그 자체 속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신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니면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좋다. 그대는 그것을 니르바나로 부를 수 있다. 그 무슨 이름이라도 좋다. 하지만 그대가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대 속에 있는 영원성을 자각하지 않는 한 종교적 체험은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삶도 살 수 없다. 그대는 놓치고 있다. 그저 모든 것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삶의 엑스터시를 놓치는 일은 얼마든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샹카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직 무엇이 변하는 것이며 무엇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아는 자, 무엇이 움직이는 것이며 무엇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아는 자만을 출가 수행자라고 부를 것이다.' 인도 철학에서 이런 식별력을 비베크(vivek)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영역, 즉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 바로 비베크인 것이다.

이 방편은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아주 깊게, 그리고 아주 쉽게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는가? 이 두 가지 영역을 기억하라. 배고픔은 주변에 의해서만 느껴질 수 있다. 주변은 음식을, 영양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음식이 필요없다. 어떤 영양분도 필요없다. 그러나 육체도 그것을 필요로 한다. 기억하라. 배고픔이 일어날 때 그것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 사실을 아는 자일뿐이다. 만약 그대가 거기에 없다면 배고픔은 알려질 수 없다. 만약 육체가 거기에 없다면 배고픈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 그대 없이 지식만 존재할 수 없다. 육체는 아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다. 반대로 그대는 그것을 알지만 가질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배고프다'라고 말하지 마라. 항상 이렇게 속으로 말하라. '나는 내 육체가 배고프다는 것을 안다.'

그대의 앎에 주안점을 두라. 그때 식별력이 생겨난다. 그대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나는 늙어가고 있다'라고 말하지 마라. 단지 이렇게 말하라. '내 육체가 늙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순간이 올 때 그대는 역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몸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단지 집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이 식별력이 깊어지면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자, 두 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67]

여기에 변화의 구(球)가 있어 변화하고 변화한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변화라는 것이다. 그대 자신, 아는 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변화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세상 전체는 변화의 현상을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조차 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그것이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히말라야는 세상에서 가장 젊은 산이다. 그것은 성숙하고 있다. 아직 쇠퇴하는 시점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히말라야와 빈드야찰(Vindhyachal)을 비교한다면 히말라야는 어린애 나이밖에 되지 않는다. 빈드야찰은 가장 오래된 산들 중의 하나다. 그것은 너무 늙어서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지난 수십 세기 동안 그것은 계속 낮아졌다. 따라서 히말라야처럼 굳건하고 요지부동으로 보이는 것도 변하고 있다. 그것은 돌들의 강이다. 돌 역시 강물처럼 흘러 다니는 것이다. 그 변화의 속도가 달라 보일 뿐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그대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말의 요지를 기억하라. 그대가 알 수 없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아는 자,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변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항상 앎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아는 행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주체인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알든지 그것은 그 뒤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동요하지 마라. 그대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그것이 대상으로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이라는 관계점에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볼 때 그대는 알려지는 대상이 되고 나는 아는 자가 된다. 지식은 하나의 다리로서 거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어디서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 다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오직 나 자신만이 홀로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인 것이다. 둑은 한쪽밖에 없는데 어떻게 다리를 연결한단 말인가? 어떻게 아는 자 자체를 안단 말인가?

그래서 자기 인식(self-knowledge)은 부정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직접 알 수 없다. 그대는 단지 그대가 아닌 것만을 계속 제외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다시 말해 그대가 어떤 것도 알 수 없을 때, 단지 텅 빈 허공만이 남아 있을 때 -이것이 바로 명상이며 명상은 단지 지식의 모든 대상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때 의식이 존재하는 순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앎만이 있을 뿐 알 수 있는 대상은 없다. 앎이라는 단순하고 순수한 에너지만 흐를 뿐 대상은 없다.

아무것도 알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어떤 특별한 감각으로 안다고 경전은 말한다. 그러나 그 지식은 다른 모든 종류의 지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쓴다면 오해가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아는 지식이란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그 단어는 사실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지식은 항상 그 대상으로서의 타자(他者)가 있다. 따라서 자기를 아는 지식이란 가능하지 않다. 자기는 결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없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그것을 '자기 인식(self-knowledge)'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 도처에, 이 벽조차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제 물리학은 이 말을 지지하고 있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벽조차 매순간 변하고 있다. 거대한 흐름이 거기에 계속된다. 모든 원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모든 전자들이 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그대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벽은 영원히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아침에도 그대로이고 오후에도 그대로이며 저녁에도 그대로이다. 어제도 그대로이고 내일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마치 동일한 것처럼, 변치 않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 선풍기가 있다. 그 날개가 아주 빨리 돌아가면 그저 하나의 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날개 사이의 공간은 그 원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자 알갱이들도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다. 그대 눈에는 날개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다. 선풍기의 날개는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대의 손을 그 틈 사이로 넣을 수 없다. 손가락이 들어가기 전에 다른 날개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기 때문에 그대는 언제나 날개만을 만질 뿐 틈새로 들어갈 수 없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지면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물들은 움직이지 않는 거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너무나 빨리 움직인다. 단지 그 움직임의 겉모양을 보고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편은 모든 것이 변화라고 말한다. '여기에 변화의 구(球)가 있어…' 붓다의 모든 철학이 이 경구 위에 서 있다. 붓다는 모든 것이 흐름이며, 변하고 있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된다고 말했다. 붓다는 바로 이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그는 말한다. "변화, 변화, 변화, 이것을 계속 기억하라." 왜인가? 그대가 변화의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거기에 분리가 일어난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그대는 어떻게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어떤 얼굴을 본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대가 그 얼굴을 볼 때 아름다움이 계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하라. 이 아름다움이 계속 남아 있으리라고 결코 기대하지 마라. 하지만 그대가 이 아름다움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안다면, 단지 이 순간만 아름다우며 다음 순간 추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실히 자각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거기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육체를 보라. 그것은 살아 있다. 다음 순간 그것은 죽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그대가 변화를 느낀다면 말이다.

붓다는 그의 왕궁을 떠났고 그의 가족을 떠났다. 그의 아름다운 부인과 자식도 떠났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왜'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식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붓다가 왕궁을 떠나는 날 밤에 그의 아들이 태어났다. 붓다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러 아내의 방으로 갔다. 거기엔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있었다. 아내는 등을 문으로 향한 채 아기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붓다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곧 그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그의 마음에는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아기는 태어난 지 하루, 아니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기의 얼굴을 봐둬야 한다. 그러나 다시금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늘 태어났지만 다음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여기에 없다. 지금 그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그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떠났다.

그 후에 어떤 사람이 '당신은 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났습니까?'라고 묻자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었다. 변하는 것에 집착한다면 좌절감만 느끼게 될 것이다. 변하고 있는 것에 집착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자다. 그것은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나는 좌절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다. 만약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때만이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부질없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만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이 방편은 아름답다. 이 방편은 말한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붓다는 이 후반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반부는 기본적으로 탄트라적 전통이다. 붓다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만 말했다. 그것을 느낀 그때 그대는 집착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집착하지 않을 때 점점 변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변화가 없는 내면의 중심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통해 변화를 계속 소멸시켜 나가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을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중심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바퀴의 중심으로 말이다. 붓다는 자신의 종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퀴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바퀴는 계속 움직이지만 그 중심은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삼사라, 이 윤회의 세계는 바퀴처럼 움직인다. 그대 개체의 인격은 바퀴처럼 돈다. 그리고 그대 내면의 본질은 바퀴의 중심처럼 부동한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붓다는 '삶은 변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 방편의 전반부에 대해서 찬성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편의 후반부는 전형적인 탄트라의 문구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고 말하고 있다 탄트라는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속으로 뛰어들라고 말한다. 집착하지는 마라. 그러나 뛰어들어라. 왜 두려워하는가? 그 속에 뛰어들었다가 살아 나오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라. 변화 자체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두려워하지 마라. 달아나지 마라.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변화는 어디에든 있다. 탄트라는 말한다. 모든 것의 변화는 도처에 있다고. 그대가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변화를 피해서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그대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모든 도피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므로 도피하려 들지 마라.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집착하지 말고 변화 속에 살아라. 변화가 되라. 변화에 대해서 어떤 투쟁도 하지 마라. 그것과 함께 움직여라. 강물은 흘러가고 있다. 그대도 강물과 함께 흘러가라. 헤엄조차 치지 마라. 그저 강물이 그대를 실어 나르도록 하라. 흐름과 싸우지 마라. 그대의 에너지를 흐름과 투쟁하는 데 낭비하지 마라. 그저 푹 쉬어라. 그저 내버려둬라.

투쟁 속에서 그대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 사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탄트라는 '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싸우지 마라. 그럴 필요가 없다. 그대의 내면으로는 변화가 들어올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 세상에 살아라. 이 세상이 그대 속으로 들어올까봐 두려워하지 마라. 이길 저길을 모색하지 마라.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 가지는 변화하는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도망가는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것 역시 변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으며 도망가는 것 역시 같은 것이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변화의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탄트라는 말한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둘 다 부질없다. 그러니 변화가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그대는 그것과 관계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일어날 것이고, 그대는 그것에 대비할 필요조차 없다. 그대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 왔다. 앞으로도 그대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변해갈 것이다. 그러니 왜 일부러 번잡스럽게 만드는가?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가르침이다. 분노를 통해 분노를 소멸시켜라. 섹스를 통해 섹스를 소멸시켜라. 탐욕을 통해 탐욕을 소멸시켜라. 삼사라를 통해 삼사라를 소멸시켜라. 그것과 싸우지마라. 그저 푹 쉬어라. 싸움은 긴장을 만들고 고뇌와 근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는 불필요하게 복잡해질 필요가 없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둬라.

두 가지 종류의 유형이 있다. 한 가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유형이다. 그들은 혁명을 부르짖는다. 그들은 그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변화시키려고 투쟁할 것이다. 그들은 변화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을 파괴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변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변해 왔다. 어떤 혁명도 진짜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자체가 혁명이다. 그것은 변하고 있다.

그대는 왜 인도인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지 궁금해 할 거이다. 그것은 인도인들이 모든 것은 이미 변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대는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그토록 애를 태우는가? 그대는 변화시킬 수도 없고 변화를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변하고 있다. 왜 자신을 낭비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유형은 종교의 눈으로 보면 일종의 노이로제 환자다. 사실 그는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외부로만 눈을 돌려 이 세상에 빠져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변화되어야 한다. 정부도 변화해야 한다. 이 사회, 이 경제, 이 구조가 모두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자기 인식'을 통해 생겨나는 엑스터시를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는다. 세상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바퀴는 계속 굴러갈 것이다. 그것은 이미 수많은 혁명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변화를 앞당길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의 태도이다. 신비주의는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비주의 역시 두 가지 유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는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변화를 믿는다. 이 세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변화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말한다. 그 누구도 변화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도 그대 자신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비주의 중에서도 가장 깊은 핵심이다. 그대는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대 자신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대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둥둥 떠다녀라. 그 변화 속에서 편히 쉬어라.

어떤 변화도 일으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순간 그대는 전적으로 이완할 수 있다. 어떤 작은 노력이라도 들어 있다면 그대는 이완할 수 없다. 그때는 긴장이 일어난다. 미래에 어떤 가치 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화해 나갈 것이다. 세상은 이상적인 공산주의가 되든지 지상낙원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대가 미래 어느 순간에 신의 나라, 혹은 모크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낙원 한 모퉁이 어디에선가 천사들이 그대를 영접하려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 는 미래의 문제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대의 긴장은 계속될 것이다.

탄트라는 그것을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세상은 벌써 변하고 있고 그대 역시 변하고 있다. 변화는 존재계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변화는 그대가 없어도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필요치 않다. 그대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그저 떠다녀라. 갑자기 변화의 한가운데서 결코 변화하지 않는 그대 내면의 중심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동일하게 남아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충분히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변화의 배경은 그대에게 대조의 느낌을 준다. 그것을 통해 그대는 변함없음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이나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어떤 노력 속에 있다면 그대는 그대 속에 미세하게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발견할 수 없다. 그대는 변화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그대는 그 상황이 어떤지를 정확히 볼 수 없다.

변화는 온통 주위에 널려 있다. 변화는 삶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대조가 일어난다. 그대는 이완된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속에는 어떤 미래도 없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이 순간이 전부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그때 문득 그대는 결코 변하지 않는 내면 속의 한 점을 인식한다. 이것이 바로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는 의미다.

싸우지 마라. 죽음을 통해서 죽음 없음이 되라.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죽게 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탄트라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마음은 뭔가를 하고 싶어하지만, 탄트라는 될 수 있으면 뭔가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편히 쉬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이 감춰진 비밀들 중의 하나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 하나의 방편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변화를 통해 변화가 소멸될 수 있다는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죽음이 소멸될 수 있으며, 섹스를 통해 섹스가 소멸될 수 있다. 분노를 통해 분노가 타 없어질 것이다. 이제 그대는 독을 통해 독이 말라 없어질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질문]

"변화를 통해 변화를 해결하고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해결한다는 등등의 것은 인간 그 자체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집착이나 고뇌와 낙심이라는 결과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인간 그 자체만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인간 그 자체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탄트라는 그대처럼 아픈 사람을 위한 약이다. 그러니 그것이 그대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며 그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은 집착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대는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으로 떨어진 결과가 있다. 좌절감으로서 말이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집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싸우지 말라는 뜻이다. 집착하라. 그러나 또한 지켜보는 자가 되라.

집착이 거기에 있는 것을 허락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탄트라는 싸움이 없는 과정이다. 싸우지 마라. 좌절감이 올 것이다. 물론 좌절감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또한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는 집착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대는 지켜보는 자다. 이제 좌절감이 온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제 좌절하라. 그러나 지켜보라. 그때 집착을 통해 집착이 소멸된다.

그대가 불행을 느낄 때 이렇게 해보라. 불행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이것을 해보라.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 불행이 존재할 때 그대는 불행을 느낀다. 그대의 문들을 닫고 불행하라.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대는 불행하다. 그래서 그대는 불행하다. 이제 전적으로 불행하라. 갑자기 그대는 불행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것을 바꾸려 한다면 그대는 결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노력, 그대의 에너지, 그대의 의식이 변화를 향해, 어떻게 이 불행을 바꿀까 하는 것을 향해 방향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상황을 바꾸려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정말로 아름다운 경험, 즉 불행 그 자체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원인 결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초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 자체를 놓치고 있다. 불행은 거기에 있고 그것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 지 마라. 불행이 어떻게 창조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지 마라.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나중에 볼 수 있다. 서둘 필요가 없다. 불행하라. 단지 불행하라. 그것을 바꾸려 하지 마라.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가 불행한 채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라. 그대는 그 일의 전모에 대해서 웃을 것이다. 그 일의 전모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대가 전적으로 불행하다면 갑자기 그대의 중심은 불행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불행과 함께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불행은 배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코 불행할 수 없는 그대의 중심은 갑자기 솟아오른다. 그때 그대는 불행하면서도 불행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동일하지 않은 동일함'인 것이다. 이제 그대는 불행을 통해 불행을 소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이것이 바로 그것의 의미다.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불행을 통해 불행을 다 태워 버렸다. 불행은 구름이 사라지듯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푸른 하늘이 열릴 것이다. 그대는 웃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더 많은 혼란과 더 많은 불행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누가 이 불행을 만들었는가? 그대이다. 이제 그대는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면 더 악화될 것이다. 그대는 불행의 창조자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었다. 그대가 그 근원이다. 그리고 이제는 불행의 근원 자체가 노력하고 있다.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제 환자는 자신을 치료하려 한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이제 그는 수술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살인 것이다. 어떤 것도 하지 마라. 내면은 매우 깊다. 그대는 아주 여러 번 불행을 멈추려고 했다. 우울함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것저것을 정지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이 방편을 시도해 보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이다. 불행이 거기에 있도록, 그것의 전체성 속에 있도록 허용하라. 그것이 자체의 강렬함을 지니도록 놔두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라. 그저 그것과 함께 있어라.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보라. 삶은 변화다. 히말라야조차 변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의 불행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스스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변화의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대는 홀가분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번 그대가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어떤 것이라도 그것 자체를 통해서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러나 비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존재할 것이다. 분노가 거기에 있다. 그저 존재하라. 단지 존재하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만약 그대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저 거기에 존재할 수 있다면, 현재할 수 있다면, 지켜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 무위(non-doing)속에 머물 수 있다면, 모든 사물을 그것 자체의 방식대로 내버려둘 수 있다면 그대는 어떤 것이라도 소멸시킬 수 있다. 그대는 할 수 있다.

이제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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